[글쓴이 야초 한찬동]
들녘이 비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들판엔 조사료로 쓸 볏단 뭉치만 군데군데 널려 있고 마른 논엔 새들이 날아와 먹이를 찾고 있다. 고구마와 들깨를 거두고 난 밭에는 마늘이나 양파를 심은 곳도 있지만 힘이 부친 농부는 하릴없이 그대로 비워 두었다.
수확을 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은 모든 농부가 바라는 것이지만 그 결과가 만족치 않을 때는 허탈함이 더 크다. 다행히 올해는 들깨 작황이 좋아서 수확량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항상 역설적인 게, 이렇게 생산량이 많다 보면 그 값은 싸지기 마련이다. 물론 자가 소비를 하거나 이웃 친지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만족하는 소농들이야 마음 뿌듯하겠지만 시장에 내다 팔아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태고자 하는 농부들은 오히려 속이 상할 수밖에 없다.
쌀값 때문에 정부나 관련자들이 왈가왈부하지만, 농부는 그저 쌀농사에 쏟은 땀 값이나 쳐달라는 것이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쌀 한 톨 거두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정녕 모른다. 배추 한 포기, 사과 한 알에 들어간 피와 눈물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전혀 모른다.
농사가 이렇다. 좋다고 웃을 수도, 싫다고 울 수도 없다. 그래서 농부는 달관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적으면 이듬해엔 더 나아지겠지, 값이 내리면 작년에는 잘 받았으니 그냥 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보챈다고 될 일도 아니고 원망한다고 누가 해결해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우리 농부는 너무도 잘 안다.
이제 농한기다. 겨울이 다가왔다. 밭 한쪽에 먹을 만큼만 마늘을 심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며칠 따뜻한 날씨에 벌써 냉이가 새파랗게 올라오고 있다. 어느 한가한 날, 캐어서 된장국을 끓여놓고 부침개도 만들어 막걸리나 한 잔 해야겠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감나무도 감싸 주어야 하고 마늘밭도 덮어주어야 하는데, 에이 더 있다 하지 뭐! 오늘도 해는 기운다. 입동 지나 곧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이다. 계절은 가고 세월이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