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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화를 기다리며
- [글쓴이 야초 한찬동]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 이름 지어진 영춘화(迎春花)는 중국 원산이지만 우리 꽃 개나리와 유사하여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개나리처럼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이제 곧 그 꽃이 피어 진달래, 산수유 등과 함께 다투어 봄을 맞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매화며 복수초는 이미 꽃망울을 맺고 봄나들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렇듯 봄꽃들이 생기 넘치는 새봄을 위해 들떠 있는 사이, 농부들의 마음은 닥쳐온 농사로 쫓기고 있다. 고르지 못한 날씨 탓으로 제때 하지 못했던 일들이 첩첩으로 쌓였으니 몸과 마음이 다급하기만 하다. 거름을 내고 논밭을 갈아 작물 심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추웠다 더웠다 때아니게 눈까지 내렸으니 시기를 놓친 일이 적지 않다. 게다가 나라 안팎은 왜 그리 소란스러운지.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내란죄 혐의를 받고 헌법을 유린하여 파면의 위기에 처해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한 나라의 대통령은 제 마음 가는 대로 다른 나라들을 겁박하여 다시 제국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정말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영춘만개(迎春滿開)의 함성을 잠재우고 있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정작 백성을 구제해야 할 위정자들은 저희 개밥그릇이나 챙기려 벌레만도 못한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다. 그 엄동설한을 비닐 이불 한 장으로 견뎌내며 제발 살게 좀 해달라고 절규하는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권력의 부스러기나 노리며 굶주린 개처럼 혓바닥을 내밀고 있다. 죄지은 놈들은 도리어 애국자 행세고 위선자들은 짐짓 성인군자인양 날뛴다. 더없이 어리석고 무식한 것들이 감히 현자를 계몽하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이제 분노를 넘어 절망이다. 몸부림을 쳐봐야 부질없다 생각하니 급기야 자포자기 심정이다. 애당초 기대할 게 없었으나 이건 정말 꼴이 아니다. 그래서 꽃들도 피기를 저어하는가? 이 험하고 추한 꼴에 꽃은 피워 무엇하냐며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섭리는 결코 거스를 수 없다. 참았던 울부짖음은 더 큰 울림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지금, 자신의 치부와 더러운 욕망을 숨기고 궤변과 억지, 땅속의 지렁이도 치를 떨게 할 망언망동으로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은 도도한 역사의 물결과 자연의 힘 앞에 반드시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화들짝 영춘화가 피듯, 그렇게 봄이 오고 세상도 환히 빛날 것이다. 그때는 땅속에서 나와 아직 뛰어보지 못한 개구리도, 힘없이 죽어 사는 무지렁이 농부도 의기양양, 기세등등 득의(得意)의 포효를 내지르리라. 꼭 그리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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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화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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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문화생활
- [글쓴이 야초 한찬동] ‘문화’를 한자로는 글월 문(文)에 될 화(化)로 쓴다. 여기서 문(文)은 원래 ‘무늬’를 의미했다. 따라서 문화란 인간 생활의 양식이나 행동 등이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무늬처럼 새겨진 것이라 하겠다. 영어로는 ‘culture’로 쓰는데, 익히 아는 대로 ‘경작’을 뜻한다. 이는 문화를 해석하는데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일구고 축적해온 일련의 성과와 가치들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유익한 소산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농부의 입장에서 풀이해보면 결국 논밭을 일구고 작물을 가꾸어 온 행위가 바로 문화의 산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즉 그 근본과 핵심에는 농부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는 얘기다. 물론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농경은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기에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살아온 발자취이자 스스로 형성해온 문화를 오늘날의 농부들은 제대로 향유(享有)하고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화를 앞에서처럼 해석할 때 그러하다. 물론 문화와 가장 밀접한 예술의 향수(享受)를 문화생활로 본다면 그렇지 않은 게 사실이다. 농촌에서, 시골에서 무슨 음악과 미술을 감상하고 문학을 접할 수 있겠는가? 가끔 지역 축제나 큰 행사가 열릴 때 억지로 따라가서 듣는 대중가요가 고작이다. 읍면동마다 주민자치센터가 있고 평생학습관이나 복지관 등의 문화 프로그램과 취미 교실도 많지만, 거동이 어렵거나 교통이 불편한 곳에 사는 고령의 농부들이 이를 찾아 누리기는 쉽지 않다. 결국 문화생활이란 것도 지역이나 연령, 경제력 등에 따라 격차가 벌어지고 차별과 불평등이 생기는 것이다. 지역 발전과 주민 복지를 위해 성심을 다하겠다고 떠드는 작자들이 제 업적 쌓기에 급급하여 체육관과 문화회관을 짓고 가수들 불러 거창한 축제나 관제 행사만 할 게 아니라, 소외되고 위축된 계층들을 위해 함께 공감하고 체감할 수 있는 문화정책을 고민하고 펼쳐야만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 현명한 농부님들은 사실 이를 바라지 않는다. 소를 키우면서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얘기해봐야 듣지도 않으니 포기한 지 오래다. 아울러 우리는 나름의 품위 있고 고고한 문화를 누린다. 더 고상하고 멋진 예술 세계를 즐긴다. 이른 아침의 새소리는 어느 관현악 못지않은 자연의 교향악이요, 앞산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그대로 장엄한 우주의 퍼포먼스이다. 바람에 찰랑이는 벼이삭의 군무는 유명 발레 작품을 무색케 한다. 여기저기 피어난 들꽃과 서녘으로 지는 노을, 저녁의 풀벌레 소리, 밤하늘의 달과 별을 인간의 그 어느 작품에 비길 수 있겠는가? 농부는 누구 부럽지 않다. 탓하지도 시샘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자연의 무대와 순수미답(純粹未踏)의 캔버스를 망가뜨리지나 말아 달라고 외친다. “냅둬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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