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들풀의 시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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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이 들다
    달이 들다 한찬동 이 차디찬 밤에 달이 내 안에 들었다 그 달이 다 녹는 새벽까지 나는 질기게 숨이 붙어 있어 아뿔싸, 뜨는 해를 보았다 한 生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망상처럼 거듭되는 하루 또 하루 ♣ 겨울밤 빈 하늘에 떠오른 달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너른 하늘에 홀로 있는 달같이 나 자신 세상에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잠 못 이루어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아침, 또 하루가 밝았으니 꾸역꾸역 다시 일어나 살 준비를 한다. 해 지면 달 뜨고 달 사위면 해 오르듯, 그렇게 선잠처럼 세월은 가고 인생이 돈다.
    • 들풀의 시 마당
    2024-02-20
  • 해는
    해는 한찬동 산을 뚫고 치솟은 것이나 바닷물 헤쳐 떠오른 것이나 해는 모두에게 뜨거운 것이다 어제 신새벽을 밝힌 빛이나 오늘 새아침을 깨운 빛이나 해는 언제나 찬란한 것이다 땅 속 비렁뱅이 움집에 스민 볕이나 하늘 끝 드높은 방에 쏟아진 볕이나 해는 너나 없이 따스한 것이다 그래서 살아보자는 거다 그래서 기다려 보자는 거다 그래서 울지 말자는 거다 ♣ 태양은 누구 가릴 것없이 공평하게 빛과 볕을 내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빛을 볼 수 없고 볕을 쪼일 수도 없다. 세상이 그걸 가리기 때문이다. 위치와 시간에 따라 이 우주의 공유뮬조차 함께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칭얼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적어도 해는 아직 존재를 차별하지 않는다. 장막은 인간이 드리운 것이다. 사악한 건 인간이다.
    • 들풀의 시 마당
    2024-01-21
  • 어떤 세밑
    어떤 세밑 한찬동 쌓인 눈이 오래 언 땅을 덮고 있는 사이, 짧은 해가 지고 찬 달이 떴는데 누구는 눈길을 걸어 등불 따라 가고 누구는 숲속 눈을 헤쳐 어둠 안에 스미더라 또 누군가는 그냥 거기서 별만 기다렸다는데 그날 개밥바라기는 많이 아파 누웠다더라 ♣ 한 해가 저무는 날, 눈에 덮힌 저녁 풍경은 몽환적이다. 다가오는 밤, 새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경을 그려보았다. 기도를 하러 성당이나 교회를 찾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릴없이 어두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 또는 망연히 별 뜨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별조차 뜨지 않는다면 그는 얼마나 쓸쓸할까?
    • 들풀의 시 마당
    2023-12-18
  • 어떤 외출
    어떤 외출 한찬동 어느 농투성이 부부가 바퀴 네 개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나들이를 가시는 풍경이라 할배는 붉은 헬멧을 투구처럼 눌러쓰시고 할매는 전사의 등허리에 매미처럼 붙었는데 이 사륜전차는 감히 거칠 것이 없어 논밭길 신작로 읍내 큰길까지 가히 종횡무진이더라 이윽고 목적지에 당도하여 하차를 하시는데 허리굽은 할매를 할배가 냅다 들쳐업는 것이었다 때는 정오, 장터를 가로질러 한 고깃집에 이르더니 할배 하시는 말 “이르케 개벼워서 엇다가 쓴댜? 오늘 괴기 먹고 기운 좀 채려!” 할배는 그날, 하릴없는 장터 구경으로 종일을 굶으셨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으셨다더라 ♣ 등 굽은 어른들이 너무 많다. 어머니요 아버지가 다 그렇다. 멀리 떠난 자식들은 전화 한 통 없고, 아직도 일은 많아 쉴 날이 없다. 노인수당, 기초연금 찬찬히 모아서 모처럼 장터 국밥집에 갔는데, 둘이 먹기엔 돈이 모자란다. 아니 한 사람 몫을 아낀다. 요새도 우리 부모는 이러신다.
    • 들풀의 시 마당
    2023-12-06
  • 혼자다
    혼자다 한찬동 시방 우리는 모두가 혼자다 멀리 서로를 보고 있지만 다 같이 홀로인 게다 아파 누웠거나 서러워 엎드렸거나 하늘 바라 누웠거나 비 오고 바람 부는 오늘 세상 속 우리는 어느 누구의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잊히는가 보다 그래서 사라지는가 보다 그래서 다시 몸부림치는가 보다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살아있다고 ♣ 스스로는 나름 존귀하다고 여기지만, 타인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 누구에겐가 기억되고 사랑 받기 원하지만 그건 자기 생각일 뿐이다. 존재를 드러내고자 안간힘을 써봐도 언제나 나약하고 외롭고 서글픈 게 인간이다. 그래서 시방 곁에 있는 그가 소중한 것이다.
    • 들풀의 시 마당
    2023-11-13
  • 은행나무의 쓸쓸함에 대하여
    은행나무의 쓸쓸함에 대하여 한찬동 금빛 제 잎들이 밟히고 밟혀 마지막 한 잎까지 짓이겨지도록 은행나무는 가을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었다 마른 가지 끝에는 하늘 푸르고 푸르렀으나 저 편 멀리 무리 짓는 먹구름들 그 사나움을 모를 리 없는 은행나무는 지레 진저리쳐지는 두려움에 다시 온몸을 맡기기로 한다 그렇게 천년을 살아 왔다 그렇게 또 천년을 살 것이다 지독한 쓸쓸함이란 이런 것이다 수천 년 한 자리, 기약없는 붙박이로 온갖 죽어가는 것들을 지켜 보는 것 홀로 살아 있는 것 앞으로도 그리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 ♣ 은행나무는 수명이 길다. 온전하면 보통 천년을 넘긴다. 이 나무의 절정은 늦가을이다. 샛노란 은행잎은 눈부시기 그지없다. 그러나 금빛 낙엽이 땅에서 밟히는 계절에는 온누리가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그때, 그 스산한 풍경을 지켜주는 것도 또한 은행나무다. 당신 곁에도 한 그루 은행나무가 있는가?
    • 들풀의 시 마당
    2023-10-24
  • 기다림
    기다림 한찬동 그대는 오리라 저리 안간힘인데 오겠노라 달음질인데 해는 차갑고 바람 매섭고 댓잎은 서걱거리고 산이 치솟아 올라도 강물 넘쳐 흘러도 하늘 복판 질러 기어이 오겠다는데 뉘 손사레로 못 오시나 누구 발거리에 막히셨나 나야 억장 찢겨져도 그만이라 꿈으로 그리면 그뿐 불현듯 황혼이 붉듯 홀연히 무지개 뜨듯 그리 오시라 문득 곁에서 웃는 노랑 꽃잎처럼 ♣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기대이기도 하고 초조이기도 하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바란다. 아무도 오간 적 없는 길가에 문득 수선화가 피듯이. 정녕 올 것이라 믿기에......
    • 들풀의 시 마당
    2023-09-22
  • 여름이 간다
    여름이 간다 한찬동 그토록 뜨겁게 붉던 배롱나무꽃도 이제 그만 지려나 보다 귀청 찢어져라 울더니 쓰르라미도 날개가 지쳤나 보다 여름내 속살에 불질이더니 소낙비 퍼붓듯 눈물 쏟던 그 사람도 손수건 한 조작 남기지 않았구나 나도 누군가의 가슴 속엔 이 여름이겠지 가면 그뿐, 다시 못 올 계절이겠지 장대 끝에 아뜩히 머물렀던 순간이었겠지 철 따라 가자 길 따라 가자 가시 찔린 손끝, 그 핏방울이 대수랴 모깃불 사위듯 가만히 가자 ♣ 무엇이든 끝이 있다. 여름이 아무리 무더워도 가을은 그를 밀어내고 새 계절을 들여온다. 나 또한 한때는 누구에게 소중한 존재였을지 모르나 아주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곁에서 성가시기보다 조용히 떠나 잊히는 게 차라리 아름답게 기억되는 방법이리라.
    • 들풀의 시 마당
    2023-09-09
  • 여름 풀밭
    여름 풀밭 한찬동 여름 풀밭은 언제나 비명이 가득하다. 풀무치, 방아깨비, 버마재비가 목숨을 다투는 거기, 언제나 선혈이 낭자하다. 거기에 입 큰 개구리까지 염치 없이 제 몫을 달란다. 그래도 이 풀밭이 핏빛으로 물들지 않는 것은, 한낮엔 몸 숨기고 쉴 그늘이 있고 밤이면 덮고 누울 풀잎이 있어서다. 아침이면 단 이슬을 내려 또 하루를 잇게 하니 여기, 푸른 들을 떠날 수 없다. 그래봐야 곧 철이 바뀌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텐데, 공중의 날짐승은 그 우아한 천생의 재주로 촌음의 딱한 목숨들을 앗고 있다. 아뿔싸, 더 우월한 놈은 마치 신처럼 천상에서 독극물을 내리고 그도 모자라 미증유의 쇳덩이로 수천 생명의 전원을 삽시간에 갈아 엎는데, 과연 저들의 위에는 그보다 월등한 괴수가 없으려나? 하늘 푸르고 바람은 솔솔한데, 우리 너른 들판은 마르고.... ♣ 여름 풀밭은 그야말로 생명들로 가득하다. 그 생명의 터전에서도 약육강식은 예외가 없어 또 하나 전장(戰場)이기도 하다. 그래도 자연은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뭇 삶의 순환을 이어가게 하는데, 인간은 이 질서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만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저보다 더 힘센 존재가 나타나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참으로 무모하고 무지한 게 인간이다. 가을이 다가오며 하늘은 맑고 바람결도 좋은데, 풀밭은 그리 파헤쳐지고 있다.
    • 들풀의 시 마당
    2023-09-01
  • 아이와 천사
    아이와 천사 한찬동 노란 은행잎을 밟고 오는 아이에게 아내가 건넨 말 "오늘도 축복 많이 받아!" 뜻 모르는 아이는 그저 좋아라고 발걸음 가뿐 가뿐 학교에 가고 그렇게 마주친 등굣길에서 둘은 서로에게 엄마처럼, 딸인듯 손녀처럼 세월 넘어 친구가 되었다는데 훗날 아이는 말하겠지 나만 아는 천사 나만 들은 그 말을 도시락처럼 품고 학교에 갔었다고 마음 속 도시락은 공부시간 내내 따스했다고 나도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야겠다고...... ♣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아내의 실제 이야기이다. 성장 과정에서 들은 말 한마디가 평생 소중하게 간직되고 그로서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기도 하는데, 아내도 아이도 마음으로 교감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축복이 되고 때로는 사랑이 되는 그런 말들을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천사는 이 순간에도 내 곁에 있을지 모른다. 다만 못 볼 뿐이지.
    • 들풀의 시 마당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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