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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두콩의 겨울나기
    [글쓴이 야초 한찬동]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지난 가을에 심었던 완두콩이 파랗게 잎을 피우고 있다. 다른 콩과 달리 완두콩은 가을에 심어 겨울을 나서 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모양을 보면 연약하고 보잘 것도 없는데 찬 눈과 매서운 바람, 모진 겨울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물론 봄에 심기도 하지만 월동을 한 콩이 봄에 씨앗을 뿌린 것보다 알이 크고 맛도 좋다고 한다. 무엇이든 시련을 이겨내고 아픔을 견디면 그 대가가 따른다는 이치를 이로써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유난히 날씨 변화가 심했던 지난 겨울, 언 땅에 묻혀 있는 완두콩을 위해 별로 손을 쓴 게 없었다. 그냥 밑거름 조금 주고 듬성듬성 심어 놓고는 그대로 방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농부로서 제대로 돌보지도 않은 완두콩이 얼어붙은 땅거죽과 눈 속을 비집고 나와 봄 채비를 하는 것을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이제 곧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맛난 열매를 맺겠지. 실제로 완두콩은 짜장면이나 볶음밥의 고명으로 널리 쓰이고 빵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된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여 영양 유지에 좋고 이뇨 작용을 도와주는 고마운 잡곡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없이 그 열매를 착취(?)하여 제 입맛을 돋우고 배를 채운다. 좀 비약적이긴 하지만 우리 사람 사는 세상도 그렇다. 누군가의 땀과 피로 일구어내고 고난과 고통을 견디며 성취해낸 성과물에 그저 숟가락을 얻는 작자들이 적지 않다. 역사를 보면, 그런 사례가 어디 하나둘인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와 자유, 아니 방탕에 가까운 이 풍요를 과연 누가 일구어 놓았는가? 굳이 정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회는 늘 희생과 헌신, 투쟁의 일생을 산 몇몇 위인들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파레토 법칙’이란 게 있다. 80%의 결과가 20%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이 80대 20의 법칙은 사회 조직에도 적용된다. 20%의 탁월하고 성실한 조직원들이 전체를 이끄는 것이다. 나머지 80%는 그저 자리나 채우고 피동적으로 움직이며 소극적으로 편승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나누어 가진다. 물론 모든 구성체가 다 그런 건 아니다. 혼연일체가 되어 상승효과를 내고 개인적 역량의 합계를 넘어 놀라운 집단의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성찰은 커녕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80%다. 남들 노동운동하며 감옥살이할 때, 나는 공권력의 말단 하수인이었다.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고 함성을 지를 때, 나는 길 건너 방관자였다. 지금은 또 어떤가? 작물 하나 튼실하게 키워내지 못하는 게으른 농사꾼일 뿐이다. 비겁하고 무기력한 방외자일 뿐이다. 이 시각에도 정의를 위해 분노를 삭이며 자기를 담금질하는 분들에게 채무불이행의 빚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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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4-02-25
  • 또 한 해가 간다
    [글쓴이 야초 한찬동] 또 한 해가 간다. 이른 봄에는 감자를 심었다. 오뉴월, 마늘을 캔 곳에는 고구마를 심었다. 참깨는 여름에 하얀 꽃을 피워, 한때나마 세상을 향기롭게 했다. 고구마를 캘 때는 이미 가을이 와 있었다. 코를 호강시키며 들깨를 베고 나니, 벌써 은행잎이 지기 시작했다. 배추와 무를 거두어 김장을 했다. 이내 서리가 내리더니 겨울이 왔다. 손톱 끝 봉숭아 꽃물이 지워지기 전, 첫눈도 내렸다. 참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제멋대로였다. 더디게 봄이 오더니 오래 가물었다. 내내 뜨겁더니 억수로 비가 내렸다. 늦은 가을까지 기온이 높아 철부지들이 꽃을 피웠다. 시나브로 따스하게 겨울이 왔다. 웬걸, 갑자기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예년보다 빨리 첫눈이 내려 개들을 뛰게 하더니. 처연한 겨울비는 또 뭔가! 농사짓기 정말 어렵다. 게으르고 모르는 것이 많은 탓이지만, 도대체 하늘이 도와주지를 않는다. 이 애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박은 십리(十里)라도 갈 기세로 덩굴을 뻗어 덩글덩글 열매를 맺었다. 아내 말대로, 그리 돌보지도 않은 놈이 효자 노릇을 한다. 덕분에 여름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볶아 먹고 지져 먹고 부쳐 먹고 별짓 다 했다. 별미라며 어린잎까지 따 먹고, 늙은 것은 즙까지 짜 먹었다. 잎부터 열매까지 제 몸 다 바치니, 이건 그냥 효자가 아니라 효녀 심청이다. 돌아보면, 그래도 고마운 게 농토다. 수확이 적든지 많든지 그것으로 나 잘 먹고 이웃에도 더러 나누어 주었으니 족하지 아니한가. 무료할 틈 없이 일거리를 주어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하였으니 무얼 더 바라랴. 농사가 돈이 안 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이마저 없었다면 밤낮 헛짓거리만 하고 다녔을 게 분명하다. 이런 불평이 혹 다른 이들에겐 사치로 보일 수 있다. 발 디딜 땅 한 평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해야 할 터이다. 그렇다. 1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다. 헛되었는지 알찼는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했다. 하루를 사는 데는 쌀 한 홉이면 족하고 시름을 달래는 데는 막걸리 한 사발이면 된다. 이 한 몸 누울 자리는 단 한 평도 크다. 누군가 그리우면 하늘에 대고 그 이름을 부르라. 사무치게 서러우면 솔숲에서 통곡하라. 왠지 가슴 뿌듯하고 마음이 흐뭇하면 친구를 불러라. 경사가 있으면 여기 저기 알려 잔치를 벌이라. 저무는 한 해. 이런 잔치가 많았으면 좋겠다. 부를 이도 많고 찾아주는 이도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운 사람들이 서로 만났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숨죽여 우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는 세월에 미련이 없었으면 좋겠다. 떠나보내는 것에도 아쉬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잘 가라, 내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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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12-06
  • 추수가 끝난 뒤
    [글쓴이 야초 한찬동] 들녘이 비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들판엔 조사료로 쓸 볏단 뭉치만 군데군데 널려 있고 마른 논엔 새들이 날아와 먹이를 찾고 있다. 고구마와 들깨를 거두고 난 밭에는 마늘이나 양파를 심은 곳도 있지만 힘이 부친 농부는 하릴없이 그대로 비워 두었다. 수확을 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은 모든 농부가 바라는 것이지만 그 결과가 만족치 않을 때는 허탈함이 더 크다. 다행히 올해는 들깨 작황이 좋아서 수확량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항상 역설적인 게, 이렇게 생산량이 많다 보면 그 값은 싸지기 마련이다. 물론 자가 소비를 하거나 이웃 친지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만족하는 소농들이야 마음 뿌듯하겠지만 시장에 내다 팔아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태고자 하는 농부들은 오히려 속이 상할 수밖에 없다. 쌀값 때문에 정부나 관련자들이 왈가왈부하지만, 농부는 그저 쌀농사에 쏟은 땀 값이나 쳐달라는 것이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쌀 한 톨 거두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정녕 모른다. 배추 한 포기, 사과 한 알에 들어간 피와 눈물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전혀 모른다. 농사가 이렇다. 좋다고 웃을 수도, 싫다고 울 수도 없다. 그래서 농부는 달관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보다 수확량이 적으면 이듬해엔 더 나아지겠지, 값이 내리면 작년에는 잘 받았으니 그냥 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보챈다고 될 일도 아니고 원망한다고 누가 해결해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우리 농부는 너무도 잘 안다. 이제 농한기다. 겨울이 다가왔다. 밭 한쪽에 먹을 만큼만 마늘을 심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며칠 따뜻한 날씨에 벌써 냉이가 새파랗게 올라오고 있다. 어느 한가한 날, 캐어서 된장국을 끓여놓고 부침개도 만들어 막걸리나 한 잔 해야겠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감나무도 감싸 주어야 하고 마늘밭도 덮어주어야 하는데, 에이 더 있다 하지 뭐! 오늘도 해는 기운다. 입동 지나 곧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이다. 계절은 가고 세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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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11-09
  • 목화밭의 추억
    [글쓴이 야초 한찬동] 목화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옅은 노란색의 꽃은 며칠이 지나면 연분홍빛으로 변하며 차차 빛깔이 짙어진다. 꽃잎 색이 곱고 모양도 우아하여 관상용으로도 좋은 목화. 이것이 열매가 되면 다래(다래나무의 열매와 유사함)라 하여 먹을 수 있다. 안에 솜이 될 섬유질이 들어있어 식감이 좋지는 않지만 제법 단맛이 난다, 이것이 익으면 봉우리를 터트려 하얀 솜 송이를 만든다. 마치 겨울의 눈꽃 같아 우리는 이를 두고 두 번째 꽃이라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이 목화가 보기 어렵게 되었다. 예전에야 옷감을 얻기 위한 가장 가치 높은 비식용식물로 각광을 받았지만, 이제는 재배 농가가 거의 없다. 기름을 짜거나 관상용으로 일부 재배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겨울이 오기 전 먼저 눈이 내린 듯 눈부시게 하얗던 목화밭은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올해 목화를 이용하여 치유프로그램을 해보려고 모종과 씨앗을 구하는데, 쉽지 않았다. 근처 여러 곳의 오일장에 나가 보았지만 모종을 구하지 못하였다. 농사를 짓는 친지 중에도 목화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야 했다. 이곳에도 약용 면실유를 짜기 위한 씨앗은 있지만 재배용은 역시 드물었다. 어렵게 30여 알을 구하여 심었더니 그 중 반 정도가 싹을 틔웠다. 아침이면 노랗게 피어난 꽃을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이슬을 머금은 꽃은 청초한 소녀같다. 고려 때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그 씨를 붓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했던 목화는 이렇게 한 송이 고운 꽃으로 남아 있다. 나의 치유농업 프로그램은 이처럼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과 따스함을 주제로 한다. 가을에 다래가 벌어지면 이를 수확하면서 부드러운 사랑의 감촉을 느낀다. 솜 송이를 딴 후에 그 안에서 씨를 빼내는 일은 촉감을 자극하여 두뇌활동을 활성화한다. 골라낸 씨앗의 숫자를 세고 솜털을 떼는 작업은 숫자 세기 등 인지기능을 높여 준다. 씨앗을 제거한 솜은 베갯잇에 넣어 사랑의 베개를 만든다. 그 안에는 소망을 적은 쪽지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것을 자신이 베고 자면 자기애와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바깥 표면에 좋은 글귀를 새기거나 예쁜 그림을 그려 넣어 완성하기도 한다. 이것을 그동안 소원했거나 잊고 지냈던 이들에게 선물하면 인간관계 및 사회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입안에 퍼지던 다래의 은은한 단맛, 부드러운 솜털의 감촉, 눈부시게 하얗던 목화밭의 그림 같은 풍경. 그 추억을 되살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작은 농장을 꿈꾸며 오늘도 풀 한 포기를 뽑는다. 또 한송이 피어난 목화꽃을 보며 속으로 웃는다. 나이는 드는데, 자꾸 어려지는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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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8-21
  • 장마와 농사
    [글쓴이 야초 한찬동] 해마다 6~7월이면 장마가 닥친다. 장마에서 ‘장’자는 중국어 ‘長’에서 유래했으니, 오랫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기후 현상이 장마이다. 이제는 우리 고유어로서 한자로 표기하진 않지만, 그 어감상 길고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즘 장마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루 이틀 비가 내렸다 그치더니 폭염이 닥치고 다시 폭우가 쏟아진다. 그야말로 오락가락, 작달비 내리다 호랑이 장가가고, 마른장마에 무더위가 지속되고.. 여기는 내리고 저기는 안 내리고..... 이래 놓으니, 환장할 지경일 이가 바로 우리네 농부다. 예전 같으며 논에 물꼬를 단단히 봐놓고 밭에는 배수로를 정비하고 미리 제초를 하는 등 대비가 가능했는데, 도대체 농사일에 두서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후변화, 이상기후 탓이지만, 이 또한 하늘의 일이니 어찌할 것인가. 보통의 농부는 이때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마땅히 할 일을 찾아서 한다. 비가 오니 들깨를 심으면 잘 산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기에, 서둘러 모종을 옮겨 심는다. 들깨는 어린 것을 심어야 뿌리 활착이 더 잘 된다고 한다. 옛적 도롱이를 입고 농사일을 했던 조상들처럼 우비를 입거나 기꺼이 비를 맞고 일을 한다. 비를 맞아 웃자라면 좋지 않기 때문이다. 풀 매는 일도 이때가 적기다. 비가 자주 오면 풀은 무섭도록 자란다. 하루 이틀만 그냥 두어도 금방 무성해진다. 방치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다. 다행히 물기 먹은 땅에서는 풀이 쉽게 뽑힌다. 힘이 조금 덜 들고 오히려 더위를 피할 수 있으니 억척스러운 농부는 풀과 씨름하며 장마를 이겨낸다. 논밭이 아니어도 할 일은 많다. 농기구를 손질하거나 마당의 배수구롤 손 보고 미루어둔 집안일도 한다. 똑똑한 농부는 빠진 농사일지를 꼼꼼히 챙겨 적는다. 물론 이웃과 함께 부추 빈대떡을 부쳐 막걸리 한 잔 하는 여유도 있다. 그래도 마음은 노심초사, 늘 논밭에 가 있는 법. 해마다 오는 장마는 참으로 맞기 싫은 불청객이 아닐 수 없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고 했다. 힘이 없는 농부는 그저 큰 피해 없이 또 하나 장마가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어찌 농부뿐이랴. 반지하의 도시민, 장터의 노점상, 음식점 사장님, 계곡과 해수욕장의 계절 상인들. 공사장의 일용인부들. 비야 오거나 말거나, 장마가 길거나 짧거나, 언제나 서러운 우리 서민들이지만, 제발 더는 앗아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 땀과 눈물과 소망의 열매,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그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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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7-17
  • 소가 웃는 날
    [글쓴이 야초 한찬동] ‘소가 웃을 일’이라는 말은 하도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한낱 짐승까지 웃게 만드는 일이라는 뜻으로, 흔히 정치꾼들이 많이 쓴다. 그런데 이게 바로 소가 화날 일이다. 제깟 인간들이 소를 미련한 짐승으로 취급하여 낮추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개) 같은, 아니 소(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그,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하는 패거리들 말이다. 이 말이야말로 실로 소가 웃을 소리인 것이다. 소는 결코 그런 일에 웃지 않는다. 웃는 게 아니라 아마 기가 차서 혀를 찰 것이다. 누가 소 웃는 걸 봤는가? 소는 쉽게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과묵과 우직함의 상징이다. 물론 사람이 표정으로 알 수 없어 그 속까지는 모르지만, 요즘의 소들을 보면 정말 웃을 일이 없어 보인다. 호랑이와 함께 우리 민족의 상징적 동물이기도 했던 소는, 특히 농촌에서 귀하디귀한 가축이었다. 집안의 1호 재산으로, 딸에게는 시집 갈 밑천이요, 공부 잘하는 아들에게는 학비 그 자체였다. 더구나 성격이 온순하여 일을 하는 암소는 집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쟁기질을 하고 수레를 끌고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날랐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를 정성으로 기르고 또한 가족처럼 섬겼다. 이런 소가 이제는 오로지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외양간이야 외형적 환경이 좋아졌다지만, 여간해서 그 축사를 나오기 어렵다. 평생 그 안에 묶여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감옥 아닌 감옥을 벗어난다. 물론 동물복지를 생각하여 방목을 하거나 수시로 우사 바깥으로 내보내 운동을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사례다. 사람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 안에 갇혀 사육되는, 그것도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단축된 삶을 살다 가는 소에게 인간의 예의라곤 없다. 그저 좋은 등급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사료를 주고 영양제를 먹일 뿐이다. 넓은 들에서 고삐 없는 소를 몰거나 언덕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기던 추억은 아니어도 조금이나마 소를 배려하고 존중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치유농업에 그 방법이 있다. 동물은 인간과 교감 능력이 뛰어나다. 오래전부터 가축으로 길들여져 사람과 같이 생활했던 개나 소는 더욱 그러하다. 반려동물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개나 고양이는 동물교감 치유의 대표가 되었다. 소는 덩치가 크고 위험 요소가 있어 집에서 반려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치유농장을 통해 교감의 상대가 될 수 있다. 온순한 성격과 친근한 이미지는 소의 장점이다. 실제로 소를 포옹하고 그 품에 안겨 치유의 효과를 본 사례가 있다. 마음에 상처가 큰 어느 여인이 소의 목덜미를 껴안고 한없이 울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안정을 되찾기도 했다. 넉넉한 소의 품이 어머니의 품속 같았으리라. 아마, 여인과 따뜻하게 한 몸이 되었던 그 소는 여인이 자기 품속을 벗어난 후, 흐뭇하게 웃었을 것이다. 소 자신도 훈훈한 인간의 체취를 느끼며 행복했을 것이다. 소가 웃는 날은 이렇게 가능하다. 전 생애 동안 일만 하다 죽거나, 고깃덩어리로 팔리는 비참한 삶에서, 누군가의 아픔을 감싸주고 더불어 울고 웃을 수 있는 소들을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백이 황소, 아니 황혼빛 행복한 미소를 짓는 누런 암소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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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5-23
  • 두엄과 농부
    [글쓴이 야초 한찬동]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영양물질을 ‘거름’이라고 한다. 거름에는 짚이나 풀, 낙엽 등을 모아 썩히고 발효시켜 만든 퇴비, 이런 잡초나 짚을 가축우리에 넣어 분뇨와 함께 섞어 만든 두엄, 그리고 화학적으로 제조한 비료가 있다. 이 가운데 두엄 하면 떠 오르는 것이 바로 그 특유의 냄새이다. 마음 착한 누구는 이를 정겨운 시골 냄새라고 하는데, 참 고마운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당연히 악취를 떠올리고 불쾌해한다. 농촌의 흙냄새를 못 맡아본 도시인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 두엄 냄새가 요즘 들판에 가득하다. 특히 우리 지역 홍성에는 축산농가가 많아 논밭에 두엄을 많이 낸다. 가뜩이나 가축 분뇨 등 축산 부산물로 악취가 심한데, 농사철이면 으레 코를 막거나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게 오래가지 않고 잠깐이어서 다행이지, 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두엄은 참 고마운 존재다. 소나 돼지의 배설물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볏짚 등과 섞어 1차 독성을 줄여 배출함으로써 가축 분뇨로 인한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퇴비에 비해 거름기가 많아 토지를 더욱 기름지게 하고, 지력 향상에 따라서 농업생산량도 늘릴 수 있다. 또한 이는 친환경적이어서 유기농업에 요긴하게 활용되고 우리에게 좋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화학비료를 쓰면 사용도 간편하고 효과도 바로 나타나서 농사가 편하지만, 자연을 생각하는 참 농부는 두엄을 애용한다. 옷이 더럽혀지고 몸에 쾌쾌한 냄새가 배어도 굳이 힘들게 두엄을 뿌리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다. 오랜 경험에 따라 저절로 체득된 흙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냥 우러난 것이다. 지혜니 철학이니 운운할 것도 없이 내 땅을 온갖 것 깃들이는 생명의 보금자리로 가꾸려는 소박한 심성 그 자체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이렇게 제 몸을 오물 속에 던져 함께 썩혀져서 타인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겠나? 그로 인해 꽃이 피고 실한 열매가 맺혔어도 흙 속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지렁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자기 안위만을 위해 남을 해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공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두엄 같은 존재는 찾을 수 있을까? 나이 사십이 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한 채, 오늘도 경운기 가득 두엄을 싣고 비탈진 길을 터덜거리며 오르고 있는 옆집 늙은 총각이 문득 뒤돌아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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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4-18
  • 작아서 더 정겨운 생강나무꽃
    [글쓴이 야초 한찬동] 3월이라 봄이 되니 여기저기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이르게 피는 것들이 매화, 산수유 등이라 하겠다. 이 산수유와 유사하여 헷갈리게 하는 게 생강나무꽃이다. 모양도 색깔도 피는 시기도 비슷하여 보통 사람들은 같은 꽃인 줄 알기도 한다. 다른 점은 산수유가 인가나 공원, 가로변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반면, 생강나무꽃은 산자락에나 들어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강나무는 꽃과 잎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 가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찾을 수 있지만, 요즘엔 그리 흔한 나무도 아니다. 강원도에서는 이를 ‘동백나무’로 불렀는데,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꽃이다. 정선아리랑 가사 중에도 나오는 꽤 친근한 나무이기도 하다. 잎이나 껍질을 약으로 쓰고 꽃은 차나 향수로도 쓴다니 그 용도도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 꽃은 야생에서 필 뿐만 아니라 작고 초라해서 사실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산수유와 달리 이른 봄꽃의 대표로 대접받지도 못한다. 노란 꽃 덩어리가 모여 풍성하게 뭉쳐 피어야 조금 예쁘게 보일 정도다. 꽃말이 ‘수줍음’, ‘사랑의 고백' 등이라 하니 그도 이해할 만하다. 엊그제 산에 들었다가 생강나무꽃을 발견했다. 참나무, 소나무 등 큰 나무들 틈에서 작은 키에 몇 송이 꽃이 달려 있었다. 여기저기 산수유 노란 꽃이 한창이지만, 산속에 핀 이 소박한 꽃이 참 반갑고 정겨웠다. 누가 알아주지도, 잘 보아주지도 않지만, 그늘 밑에 홀로 제 향기를 내며 피어난 모습이 차라리 고고해 보였다. 저마다 잘났다고 화려함을 뽐내는 봄꽃들의 향연 속에서, 은자(隱者)처럼 세속에서 벗어나 있는 듯, 그 청초함이 더욱 아름다웠다. 우리 사람도 그렇다. 나 역시 명예를 탐하고 드러나기를 좋아하는 속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재주를 감추며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고 그게 현실이다.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여기에 권력과 부귀까지 겸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지만, 그 속내를 모를 리 있겠는가? 진정으로 애국, 애민하는 이들은 그 오예(汚穢)된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는다. 어쩌다 발을 들였다 해도 요직을 거부하고 백의종군을 자처한다. ’낭중지추‘라 하지 않는가? 감추려 해도 저절로 드러나는 충심이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시대, 생강나무꽃 같은 사람이 그립다. 나는 시골에 묻혀 사는 많은 범부(凡夫)가 바로 그들이라고 믿는다. 어느 꽃보다 먼저 피었지만, 제 모습을 감추고 은은하게 숲을 향기롭게 하는 생강나무꽃처럼, 겉보다는 속으로, 행동보다 마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은둔자들이 지금도 어디선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 마음이나 편하게 정치꾼들, 제발 오늘 하루라도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 사설/칼럼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3-21
  • 개구리 잠 깨면!
    [글쓴이 야초 한찬동] 우수 지나 경칩이 다가온다. 땅속에 몸을 묻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난다는 봄의 절기이다. 이 무렵, 꽤 오래전에는 –그래봐야 2~3십 년 전이다.- 참 재밌는(?) 일이 있었다. 지금이야 몰상식하기 짝이 없고 환경운동가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혐오 그 자체였다. 산 계곡이나 연못에 낳아 놓은 개구리알이 몸에 좋다며 찾아 먹는 풍습이었다. 심지어 잠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를 잡아 낭습 치료에 효과가 있다며 튀겨먹기도 했다. 서글픈 얘기지만, 우리 어린 시절에 개구리 뒷다리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격세지감. 이제 우리의 친구 개구리는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 토종인 금개구리는 그 개체가 줄어들어 멸종위기 야생동물 2등급이다. 종류도 다양하고 그렇게 수가 많던 개구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말 안 듣는 사람의 대명사 청개구리, 얼룩덜룩 색깔이 무섭고 독까지 있는 무당개구리, 덩치가 크고 울음소리가 우렁찬 진짜 참개구리. 등에 돌기가 있는 옴개구리 등. 다행스럽게 우리 농촌에서는 무논에 물이 차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설마 아직도 경칩 의례로 개구리알을 먹거나 개구리 뒷다리 삶아 먹는 야만인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사한 종류인 맹꽁이가 사라졌고, 도롱뇽이나 두꺼비는 보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봄농사 준비를 위해 땅을 파다 보면, 놀라 뛰어나오던 그것들이 드물어진 건 분명 오염된 자연환경 탓일 게다. 자연 순환의 한 과정이었던 전래농법이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면서 환경오염의 요인이 되어버렸다. 자연친화적 유기농업이 대안이지만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게으른 농부는 역설적으로 이를 조금 실천하는 편이다. 일하기 싫어 농약도 안 치고 비료도 주지 않으면서, 자연농법이라 우긴다. 수확이 적다 나무라면 다른 생물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둘러댄다. 해동하기 전 땅이라도 한번 갈아줘야 한다고 하면, 자꾸 흙을 들쑤셔서 좋을 게 뭐냐고 핑계를 댄다. 그야말로 개구리가 하품할 노릇이다. 그래, 개구리 잠 깨어 기지개 펴고 큰 하품할 때다. 놈의 놀림이 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풍속에 북의 가죽을 고쳤다니 먼지 묻어 늘어진 장구나 손질해 볼까? 연기를 피워 집안의 벌레나 뱀을 몰아냈다니 묵은 아궁이에 뜨끈하게 불이나 지펴볼까? 흙일을 하면 올 한 해도 탈이 없다 하였으니, 아이들 불러 흙놀이나 해볼까? 이때 고로쇠나무 수액이 뼈에 좋다니 멀리 지리산 나들이에 곁들여 막걸리나 한 잔 할까? 아서라. 개구리 고함친다. 이놈아 어서 빨리 밭에 거름부터 내거라.
    • 사설/칼럼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2-24
  • 봄이 오긴 오는가?
    [글쓴이 야초 한찬동] 중국 4대 미녀 중의 하나인 왕소군을 기리며 시인 동방규가 쓴 시중에 그 유명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구절이 있다. 봄은 왔어도 봄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시구는 때로는 날씨에, 때로는 사람의 심경에 비유되기도 한다. 왕소군이 다른 미녀들과 달리, 나라를 위해 희생한 특별한 경우이기에 그 의미는 고국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기도 하다. 이즈음, 농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 며칠 후면 입춘인데, 날씨가 대체 왜 이런지 봄이 오긴 오는 건지, 걱정인 것이다. 대개 대한(大寒) 지나 설을 쇠고 나면 날씨가 포근해지곤 했는데, 오히려 혹독한 한파에 폭설까지 내렸다, 게다가 최근 난방비까지 치솟아, 시설 재배를 하거나 축사 난방 등을 해야 하는 농가들이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나라를 원망하겠는가? 하늘을 탓하겠는가? 닭이 목이 쉬어 울어도 아침은 오듯이, 결국은 봄도 오지 않겠는가? 농부는 믿는다. 자연은 인간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끔은 혹독한 시련으로 인간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그건 하나의 섭리요 순환의 과정이다. 그래서 늘 그렇듯 오늘도 농부는 의연하게 봄을 기다린다. 입춘방을 쓰는 것도 그 기다림의 의례이다. 흔히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 쓴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게 해달라는 소망이 담겼다. 이 두 문장은 조선시대 대학자인 허목과 송시열이 각각 지었다고 한다. 당시 서민들이야 한글도 잘 모르던 시절이니, 이 한문 구절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터, 하여 이 또한 대문이 번듯한 양반집에나 붙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즘이야 마음만 먹으면 서툰 글씨로라도 써서 붙일 수 있지만, 농부에겐 그런 마음의 여유도 갖기 쉽지 않다. 눈 덮인 땅에 간혹 돋아난 나물을 뜯어 무쳐 먹는 세시풍속도 흘러간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어쨌든 입춘은 명리학적으로 보면 새해의 첫날이다. 이미 양력설, 음력 설날 다 지났으니 새해 결심이 흐트러진 사람은 다시 정초 목표를 세워도 괜찮을 명분이다. 그래 다 그런 거지. 날은 춥고 눈도 쌓였는데 어쩌겠나. 기다리자. 해토머리에 눈 녹고 따사롭게 햇빛 비치면 삽 들고 나가자. 언 땅 파헤쳐야 그게 파지겠는가? 기왕에 엎어졌으니 하늘 보고 누워 마음으로 풍년농사 그림이나 그려보자. 배꽃, 살구꽃 오얏나무 꽃 만발한 그 아래 갓끈 푸는 선비. 하얀 감자, 자주감자 광주리 가득 담고 춤추는 내 아내. 보리깜부기로 멍석만한 화선지에 난(蘭) 치는 농부. 우리 선비네목화밭에 넓디넓게 솜이불 펼치는 광경. 오늘도 게으른 농부는 일은 않고 꿈만 꾼다.
    • 사설/칼럼
    • 들풀의 농사만사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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